“선생님, 저 적금 들었어요.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알아 맞혀 보세요.”
한 명문 대학에 편입을 따낸 제자가 한 턱을 내겠다고 해서 나간 자리에서 그 애는 느닷없이 내게 퀴즈를 내며 맞혀보라고 했다. 친구들과 유럽여행 가려고? 아니오. 새 차 사려고? 아니오. 이담에 결혼비용으로 쓰려고? 아니오. 예쁜 얼굴, 더 예쁘게 고치려고? 아아니오…… 그 애 또래의 여대생들이 보통 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 들이대도 그 애는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스무고개를 거의 채울 즈음에서야 그 애는 정답을 알려주었다.
“이 다음에 우리 아이들 학비에 쓰려고요.”
“...?...!”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그 애가, 게다가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그 애가 내놓은 정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내 기억 저편에서 퍼즐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 그래, 맞다. 네 꿈은 ‘좋은 엄마’가 되는 거였지.”
커리어를 첫 번째로 꼽아 결혼도 30대 후반으로 미루고, 결혼 후에도 집을 사고 경제적 기반을 다져 놓은 후에야 아기를 갖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추세를 생각하면 그 애는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애는 “10대에 안 해 본 것이 없는” 화려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는 며칠이고 무단결석을 해 일찌감치 문제아로 찍혀 미국으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패싸움에 말려들어 머리를 콘크리트 벽에 쥐어 박혀 몇 바늘 꿰매야 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고, 새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기 싫다고 아파트를 얻어내라고 떼를 써 혼자 나가 살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무작정 차를 몰고 다른 주로 가기도 했고, 어찌 어찌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 이것저것 기분 내키는 대로하면서, 밤새도록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며 노는 것으로 소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 애가 어느 날 모든 걸 청산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아 작은 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하더니, A학점을 못 받으면 속상해 했고, 이제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 명문 대학에 편입까지 따낸 것이다.
그 애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도 ‘선생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은 덕’이라고 하며 내게 종종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그 애를 포기하지 않고 단단히 잡아주어 오늘의 그 애를 있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애의 어머니이다. 나는 수년 동안 그 어머니를 지켜보며 어디에서 그런 인내와 지혜와 아이에 대한 믿음이 나오는 것일까, 하고 감탄하곤 했었다.
그 애 어머니를 생각하면 김영남 시인의 ‘검정 고무줄에는’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내복의 검정 고무줄을/ 잡아 당겨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고무줄에는 고무줄 이상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이상의 무얼 끌어안은 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무엇을 묶어본 사람이면 또 알 겁니다/ 어머니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을/ 그래야 사람도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일수록 그런 신축성을 오래오래 간직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고무줄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어머니란 리어카 바퀴처럼 둥근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둥근 등을 굴려 우리들을 큰 세상으로 실어낸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지상 모든 고무줄을 비교해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세상에서 제 일 훌륭한 고무줄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그 애는 알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이 결국은 좋은 고무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고무줄이란 것을!
이영옥 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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