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후 성가연습을 위해 모였다. 실수 없이 잘 해서 일찍 끝내자고 맘을 모았다. 하나, 두울, 셋. 아름답고 우아하게 잘 나가는가 싶더니, 이게 웬일? 첫 줄도 끝나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박자를 잘라먹고 넘어간 것이다. “탕, 탕, 탕, 다-시.” 두 세 번 반복했지만 여전히 마찬가지다.
“누구예요? 아무리 빨리 끝내고 싶어도 박자만큼은 제대로 끌어주고 갑시다.”
모두들 연세 많으신 정권사님, 기가 막히게 음을 다스리는 김전도사님에게 혐의를 두는 눈치지만 정작 본인들은 ‘나는 아니올시다’하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결국 반주자의 예민한 음감에 범인이 걸려들고 말았는데 ‘이를 어쩌나?’ 평소에 “실수하는 사람, 특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목청을 높이곤 하던 바로 나, 잘난 내가 범인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현행범으로 잡혔으니 어쩔 것인가. 얼굴이 벌게져서 위기를 넘길 궁리가 분분한데, 그러면 그렇지, 장난기 많은 강 집사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자지러질 듯 웃으며 놀려댔다.
“아 고소하다. 우리 사모님이 실수를 하다니. 세상에 이렇게 통쾌할 수가!”
‘으잉, 통쾌하다고?’ 민망해 죽겠는데 놀려먹다니. 은근히 치미는 부아를 누르며 말했다. “아니, 집사님은 내가 실수한 게 그렇게 재밌고 좋아요?”
“그럼요. 난 사모님이 좋으면서도 너무 완벽해서 어렵고 무서웠거든요. 그런 사모님이 실수를 하니까 너무너무 신나요. 사모님도 틀리는 게 있다니, 아- 이젠 맘이 편해요. 깔깔깔.”
유난히 열등감이 많았던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 대단해요’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비로소 마음이 놓이곤 했다. 내 딴에는 살아남기 위해, 인정받고 사랑 받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뭐든지 잘하려고 늘 긴장하며 애써왔는데,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을 질리게 하고, 스스로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만하면 됐다’고 안도의 숨을 쉴 때,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마음이 여전히 슬프고 아프다면 이미 그것은 성공이 아닐 것이다.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자가 아닌,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맘 편히 다가갈 수 있는 여유로운 가슴을 가진 사람, 흔들리는 연약한 손을 잡아주기 위해 전력질주 하던 발걸음을 기꺼이 멈출 수 있는 사람, 누추함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안을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진 사람을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식이나 말이 아니라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그렇게 살고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 우선 생긴 대로 살고, 맘 편히 실수하는 법부터 배워볼까?
김 선 화 (샌 페드로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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