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가정환경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도 꾸지 못했던 시골청년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노력한 끝에 첨단 소프트웨어를 개발, 세계의 선두를 달리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이끌고 있다.
뉴저지주 위파니에 있는 Image Solutions, Inc.(ISI)의 김진수 사장(47)이 바로 그 주인공. 그의 연구개발과 창업 스토리를 듣노라면 바로 한인 ‘빌 게이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ISI는 김사장이 11년 전 창업한 벤처회사이다. 지금은 이 회사에서 100여명의 우수한 직원들이 소프트웨어의 연구개발과 고객서비스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창업 당시는 집에서 컴퓨터와 씨름한 김사장 한 사람이 전 직원이었다. 창업 경비로 2만달러를 처가에서 꾸었고 부인이 네일살롱에서 일하여 생활을 꾸려가는 동안 김사장은 밤낮없이 컴퓨터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첫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었다. 김사장의 개발분야는 종이서류를 전자서류로 바꾸는 소프트웨어인데 이미지화와 PDF 전환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때마침 독일의 한 제약회사가 신약신청서류를 전자화하는 작업을 이 회사와 계약,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창업 5년 후에는 직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1996년 산도스제약(후에 노바티스로 개명)이 신약신청 서류의 전자화를 요청, 종이서류 20만장에 달하는 분량을 전자화하여 FDA에 제출했다. 이 서류를 접수한 FDA는 앞으로 모든 신약신청서류를 전자서류로 접수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ISI는 급속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직원이 10명에서 30명으로 늘고 또 90명으로 늘어갔다. 1999년에는 아스트라제약에서 150만 페이지를, 화이저 제약에서 600만 페이지를 전자화 하는 기록을 세웠다.
ISI회사는 1998년 스미소니안 기술혁신 목록에 선정됐고 뉴저지 최고성장 기술기업 50개사로 4년 연속 선정되고 있다.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은 세계 굴지의 회사들과 주요 정부기관들이 망라되어 있다. 예를 들면 (1)존슨앤 존슨, 화이저, 브리스톨마이어, 암젠, 바이오젠 같은 제약사 (2)연방 노동부, 보사부, 에너지부, 연방 질병통제소(CDC), FDA, TVA, UN 등 정부 및 국제기구 (3)씨티뱅크, 엑슨모빌과 같은 대회사 (4)연방파산법원, 대형 법률회사 등 굵직굵직한 고객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회사를 창업하여 경영하고 있는 김사장은 강원도 삼척의 한 농가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학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술을 배워 한전에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기에 삼척공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공전 2학년(고교 2학년) 때 그는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설교를 듣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복음이었던 것이다.
공전을 졸업한 후 한전에 입사한 그는 빚을 얻어 인하공대 야간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계속하여 한전의 변전소에 근무했다. 그런데 그는 당시 한전의 전력을 원격감시하는 컴퓨터 시스템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10년간 공부한 전기공학 보다도 컴퓨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어 그는 밤낮없이 컴퓨터에 매달렸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 자연히 다른 사람보다 지식도 앞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29세 때인 1984년 한전에서 보내준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컴퓨터 선진국인 미국에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했고 2년간 준비기간을 거친 후 31살 때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 때 이미 결혼하여 5살짜리 아들까지 있던 김사장은 컴퓨터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벌면서 뉴저지주 호보켄에 있는 스티븐스 공대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정상적으로 공부해도 2년 걸리는 석사학위를 3학기에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직, 2년간 매일 15시간씩 일한 결과 소트트웨어 개발에 대한 지식을 밑바닥부터 배우게 되었고 초봉 2만5,000달러에서 4년 후에는 8만달러의 개발연구부 디렉터가 되었다. 그 후 회사가 인수합병과정을 겪을 때 그는 “이제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 그 회사를 그만 두고 창업한 회사가 바로 ISI인 것이다.
그는 회사가 작았을 때는 그럭저럭 꾸려갈 수가 있었으나 규모가 커지면 경영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2년간 또 경영대학원에서 공부, MBA를 받았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나니 그 전에 몰랐던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첫째, 경영에 대한 안목, 둘째 경쟁자에 대한 분석력, 셋째 지도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관념이 바로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연구와 분석을 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는 골프 실력에서 알 수 있다. 골프를 시작한지 1년 반인 그의 핸디는 18이다. 연구, 분석, 노력의 결과라고 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우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기술력이 밑바탕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경영도 또한 벤처감이다.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 전략을 고려 태조 왕건의 전승전략에 비유한다. 왕건은 “나를 알고 적을 알고 지형을 알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말을 “나를 알고 적을 알고 환경을 알면”이라고 설명한다.
기업환경 즉, 경제와 기술의 추세 변화와 제도 변화 등 환경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업의 성패는 사람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에 달렸고 사장과 직원의 관계는 사장이 먼저 손을 내밀어 직원이 잘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몇년 전 자신의 주머니
에 들어온 순수익 100만달러를 고스란히 직원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이익금이 나면 매년 10%를 꼬박꼬박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아직 개인기업으로 되어있는 이 회사를 더 크게 키우려면 기업을 공개하여 주식시장에 상장해야 되겠지만 주주들이 많아지면 이런 기부를 찬성하지 않을 것 같아 확장마저 꺼리고 있다고 한다.
ISI회사의 직원은 3분의 2가 한인이지만 고객은 100%가 미국회사들이다. 그는 고객들이 이 회사에 일을 맡기는 이유는 철저한 신용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상황판단이 빠르다는 장점과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신용만 잘 지키면 1등 민족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또 그는 비즈니스를 창업할 때 자금이나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있느냐 보다도 그 사업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대가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종교적 감화에서 획기적인 인생의 전환을 경험했던 그의 생활은 지금도 종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인교회의 장로 직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과 경영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성경에서 해답을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누리고 있는 성공과 또 앞으로 올 지도 알 수 없는 몰락에 대해서도 초연해 있는 듯 했다.
<이기영 본보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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