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보 발전한 한국 무협액션의 현주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80년대 초... 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 중에 ‘그레이트 마징가’라는 것이 있었다. 마징가Z의 뒤를 이어 지구를 지키는 이 로봇에게는 매회 강력한 악당 로봇들이 시비를 걸어왔는데, 그 당시 어린이였던 기자의 눈에는 그 나쁜 로봇들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하고 잔인한 녀석들이었다.
왜인고 하니...주인공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는 그 로봇의 가슴이나 배에 이식을 하여 마징가를 포함한 주인공들로 하여금 선뜻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하면 배꼽에 달려있던 사람 얼굴이 징징거리고, 칼로 내려 칠려고 해도 가슴팍에 있던 얼굴이 슬픈 표정을 짓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죽일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그 고통의 현실...
각설하고...왜 이렇게 사설이 길었느냐 하면, 바로 영화 ‘천년호’가 그레이트 마징가의 고대(古代)판 버전이기 때문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천년동안 호수에 봉인해둔 저주받은 원령이 부활하여 주인공 비하랑 장군의 아내에게 빙의(憑依)되어 신라 사직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요괴를 잡자니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그렇다고 모른 척 피하자니 신라가 망할 판이다. 자..과연 우리의 주인공 비하랑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느 정도 결말이 눈에 보이는 마징가식 스토리 라인은 차치하고라도, 영화 ‘천년호’는 기존 한국 무협영화와는 확연히 차별된 비쥬얼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엄청난 규모로 펼쳐지는 신라 황궁의 위엄, ‘정성’이라는 단어가 뚝뚝 묻어날듯한 화려한 신라 복식의 고증, 팔다리가 잘려 꿈틀대는 모습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못지 않게 잘 표현한 전투 장면, 보기만 해도 황홀한 대나무 숲과 안개 그윽한 천년호의 풍광 등 사전 준비기간만 2년을 소요했다는 것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증명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와이어 액션의 발전상이다. 유독 천년호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와호장룡’에 길들여진 관객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유치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일보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래저래 천년호는 ‘애쓴게’ 눈에 보일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시킨 아우타족이 왜 그리 복수에 집착하는지, 진성여왕이 비하랑에게 어떻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보충되었더라면 더 완성도 높은 영화가 나왔을 법도 하지만... 영화나 인생이나 후회는 항상 남는 법이다. 관객의 상상 속에 맡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
감독: 이광훈
주연: 정준호, 김효진, 김혜리
개봉: 2003년 11월 28일
이한우 기자 webro@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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