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의 고목(枯木)
가톨릭 성지인 절두산 입구 오른쪽 구릉 아래쪽에는 거대한 고목(古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서울시가 1968년 7월3일 보호수(서14-2)로 지정한 그 고목은 수령이 무려 23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로 둘레가 348센티미터, 높이는 21미터에 이르는 거목(巨木)이었습니다.
2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켜온 성지의 파수꾼인 동시에,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차별 없는 안식을 제공하는 넉넉한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그 그늘 아래에서 명상에 잠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01년 9월 스위스에서 돌아오니, 절두산 성지는 전혀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14개의 기도처로 이루어져 있는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가 신설되고 김대건 신부상 앞에 잔디밭이 조성되는 등,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느티나무 주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야외 미사를 위한 20미터 길이 정도의 야외 강단이 신축되어 있었는데 느티나무가 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콘크리트 강단이 느티나무를 완전 포위한 형국이었습니다. 경관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 거목은 말라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 주위로 콘크리트 강단에 원을 파 빗물이 스며들게 했지만, 그 정도의 턱없이 부족한 수량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던 고목(古木)이 끝내 고사(枯死), 고목(枯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지 측에서 뒤늦게 나무 주위의 콘크리트를 철거하였지만, 그러나 한번 죽은 나무는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목이 탔던지 껍질마저 온통 터져 버린 고목(枯木) 앞을 거닐 때마다 가슴이 저밉니다. 콘크리트 강단에 갇혀 죽음의 갈증을 밤낮으로 절규하다 황량하게 말라죽어 버린 그 나무의 모습이, 오늘날 물량주의에 메말라 가는 한국 교회-신·구교를 포함하여-의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하)
2003년 10월 ‘쿰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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