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를 들어 뉴욕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중국이나 터키에서 발생한 지진보다도 변덕스런 요즘의 뉴욕 날씨에 더 신경이 쓰인다. 또 1차대전과 2차대전 같은 과거의 큰 전쟁보다도 이라크전쟁과 그 다음에 또 어떤 전쟁이 나서 우리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걱정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초월할 수 없다. 시공이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각부터 다르다. 이조시대의 남녀관계와 남녀평등시대인 요즘의 남녀 관계가 다르고 미국인과 아랍인의 시각 차이가 다른 것은 시간과 공간이 다른 세계에 각각 사는 차이 때문이다.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남한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개개인이 처한 환경, 즉 생활수준이나 교육 및 생활 경험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다.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언론이다. 흔히 언론은 공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전제할 때만 공정성 여부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느 시점에서, 또 어느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론보도도 때와 장소가 다를 때는 불공정한 편파 보도가 될 수 있다. 사실이나 진실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각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CNN과 아랍방송의 이라크전쟁 보도, 한국신문과 북한노동신문의 보도가 서로 딴 판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요즘에 비해 시간에 따른 변화가 빠르지 않았고 생활환경이 단순한 편이었으므로 사람들 간의 생각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격차가 매우 심해졌다. 나라간의 빈부 차이, 개인간의 빈부 차이,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런 환경의 차이와 함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활속에 스며들어 있다. 또 이와같이 복잡한 생활환경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과거처럼 사람들은 더 이
상 명분, 의리, 인정 등 단순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수많은 가치관이 충돌하는 갈등 속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같은 동포로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의 차이 때문에 이질성도 있다. 이런 이질성 때문에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일이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로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문제가 한국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는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LA의 4.29폭동 때처럼 한인들의 생활의 터전을 잃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재미한인들은 이런 사태의 후유증이나 여파를 걱정하게 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또 IMF사태 같은 일이 한국에 발생할 경우 한국인 중에는 많은 고통을 겪을 사람들이 있겠지만 한인들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달러 환율이 올라간다면 한국에 송금하는 사람에게는 유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때, 같은 곳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한국에서 경제가 나빠질 경우 미국에서 세탁소나 네일가게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여행사를 하는 사람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과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갈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은 인체 속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처럼 평소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인체의 조건에 따라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듯이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은 사회조건에 따라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계기가 앞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미 나타나고 있는 한미간의 갈등과 앞으로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북한이 대결할 경우 한국과 재미한인들 간에, 또 재미한인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 현상이 표출될 우려도 있다. 다만 그런 문제를 일으킬 계기가 발생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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