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콩나물국을 끓이려고 콩나물을 씻다가 불현듯 처음 뉴욕에 왔던 때가 생각났다.도착 후 며칠이 안되어 집안에 조카 돌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치를 때였는데 일을 도와주던 분이 콩나물 꼬리를 떼지 않고 그냥 삶아 무치는 것이 아닌가.
“왜 콩나물 꼬리를 안떼고 그냥 하느냐?”는 물음에 “그걸 언제 따고 앉아 있어. 여기선 그냥 해”하는 대답이 왔다.그러면 먹을 때 목에 꼬리가 안 걸리나? 미국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한다는 얘기에 ‘내가 참으로 야만적인 동네에 왔네’ 했었다.
어려서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으며 형제간에 서로 물을 주겠다고 부단히 싸웠었다. 시루위에 얹힌 젖은 헝겊 보자기를 열면 새파란 떡잎이 올라오다가 하루가 다르게 쑥 쑥 커오던 콩나물, 5cm 크기 이상으로 통통해지면 뽑아서 바가지나 양푼에 수북히 뽑아 담고 꼬리를 떼내고 반찬을 해먹었었다.
엄마의 일손을 도와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 콩나물 꼬리를 떼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것을 잘라내지 않고 그냥 먹는다는 것이 미국에서 받은 첫 충격이었다.그런데 그날 이후 지금은 당연히 콩나물 꼬리를 그대로 붙인 채 조리한다. 한인식당이나 잔칫집 콩나물 요리에도 당연히 꼬리는 붙어있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 TV 드라마를 보는데 만두 속에 넣을 김치 껍데기를 벗기고 하면 더 맛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김치 껍데기를 벗기고 만두소를 만드나 싶어 이해가 잘 안되어 여기 저기 물어보았다. 김치 어딜 벗기지? 껍데기를 벗기면 씹히는 맛이 더욱 부드럽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여성들은 콩나물 꼬리도 떼고 김치 껍데기도 벗기는 시간이 있나 보다 싶었다.
가정주부치고 누군들 식구들에게 정말 맛있는 음식, 정성 가득한 요리를 식탁에 올리고 싶지 않을까? 너무 피곤해 식탁이 부실해지면 그냥 미안해지지 않던가. 섬세하게 음식을 다루고 이왕이면 시래기 국을 끓일 때 시래기 껍질도 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일하는 여성이 대부분인 한인가정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산적해 있는 집안 살림을 누가 하나? 물론 일부 여성들은 집안 일 돌봐주는 사람, 청소해주는 사람을 두고 한가한 시간에 마사지 받고 사우나 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늦은 시간 집에 오면 가족들 배고플세라 옷도 제대로 못 벗고 부랴부랴 저녁 차리기 바쁠 것이다. 저녁 설겆이를 하면서 다음날 먹을 찌개나 국, 반찬이라도 한가지 만들어 놓으려면 물에서 손떼는 시각이 밤 10시, 11시일 것인데 김치 껍데기를 벗겨 만두를 빚는다? 콩나물 꼬리를 뗀다? 그것은 이곳에 사는 여성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집안 화초에 제대로 물을 주지 않아 말라 죽인 화분이 무릇 몇 개던가? 그래도 수년 전까지
만 해도 만두를 직접 빚어 먹었었다.
만두피와 다진 고기, 물기 꼭 짠 두부와 김치, 송송 썬 부추 등의 만두소와 만두피 오무릴 때 필요한 달걀 노른자를 준비하면 아이들은 우당탕 달려와 자기네들이 만두를 만들었다.처음엔 서로 하겠다던 아이들이 나중엔 냉동실 윗칸에도 꽉 꽉, 냉장실 저장고에도 가득 찬 고기만두에 질렸는지 나중엔 만두 빚을 준비만 하면 “오, 노우!”를 외쳤다.
콩나물 꼬리 붙여 요리하기에 이어 김치 껍데기 벗긴다는 또 하나의 충격을 무마하려면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신김치를 넉넉히 넣고 만두를 빚어야 할 것같다.2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가끔, 알뜰하게 살림 잘하고 집안도 예쁘게 꾸며놓고 사는 전업주부를 보면 나도 저렇게 해놓고 살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싶어 질투가 난다.하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주말을 온통 빨래다 청소다 요리다 하며 속절없이 보낸 일요일 저녁이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월요일 아침 출근 때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또 웬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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