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노라면 모두 책 몇 권은 써야 된다고들 한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던 지난 일들이 고진감래로, 때론 추억처럼 아름답게 떠올려지는가보다.
나는 한국에서 결혼한 지 6개월만에 신혼의 단꿈을 깨고 남편은 한국에서 대학원에 재학 중이어서 같이 못 오고 동생들과 먼저 이민을 오게 되어 L.A.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래 부유치 못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나였지만 나름대로 이민생활은 “고생” 그 자체였다. 3일 만에 양로원에 나가서 일하기 시작하여, 허리와 무릎이 아파 울면서 잠을 잘 때도 있었고, 남편에게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누가 볼 세라 직장 화장실 안에서 엽서를 쓰곤 했었다.
3년 후 큰애가 2살 때쯤, 유아원에 데리고 다니며 일하다가 운영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다칠세라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때론 다친 아이를 안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가며 가슴을 조이던 때도 있었다.
LA 생활 9년쯤 되었을 무렵 남편이 전도사와 부목사 시절을 마감하고, 단독 목회를 시작하기 위해 샌버나디노로 이사 오게 되었다. 이곳은 또 다른 사막처럼 느껴졌다. 이민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삭막한 목회생활과 함께 고난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내겐 고생의 끝이 없는 -마치 나만 겪는 양- ,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이민자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각기 다른 양상의 어려움일 텐데….
그러나 사모가 겪는 고난은 그것 이상의 무엇이 더 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사모이어야 하는지 좌절과 수치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고, 듣지 않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사모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을 때도 있었다. 생전 안 해보던 일들을 배워서 하기도 하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지도 모르는 채 묵묵히 참고 지내기를 이곳에서도 10년 넘게 보냈다.
이제 20년이 넘어온 이민생활을 돌이켜 보니 그래도 많은 변화가 보였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우선 남편과 내가 어떤 경우에도 자족하며 감사하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의젓하게 자라준 두 아들과 중년의 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나의 울타리가 되고, 교회를 지켜온 남편이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고난이라는 말 대신에 감사가 북받쳐 오른다.
지난날의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이제는 고난이 나의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 나는 너무나 많은 값진 삶을 배우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어려움은 감사의 시작이며, 사막에도 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라고….
신 혜 원
(새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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