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9월 23일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케네디 공항의 불빛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내 꿈을 실현시켜야겠다는 각오와 부푼 꿈으로 가득 찬 나는 공항의 찬란한 불빛 위를 힘차게 튼튼한 날개를 저으며 훨훨 날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희망과 꿈이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한국의 학력과 경력이 무시된 채 살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직업들 - 봉제 공장, 캐시어, 식당 종업원, 네일 살롱 일 등등.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리 속에 왔다 갔다 맴돌았다. 그렇게 한동안 방황 끝에 택한 일은 봉제공장의 미싱사였다. 처음 잡아본 공장용 미싱은 속력이 빨랐고 소리가 컸다. 반듯하게 박는다는 것은 무척 힘들었고 어느 때는 미싱바늘에 손을 찔리기도 했다. 미싱을 배우는 한동안은 주급이 없어 차비조차도 언니한테 타서 썼다.
내 옆에서 종일 미싱을 돌리는 아주머니께 “아주머니, 팔자 나쁜 여자들이 미국에 오나봐요” 하면 “글세 말이다. 한국에 있으면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아이들이나 키우면 될텐데”
한국에서 큰 사업 하셨다는 다림질하는 아저씨, 국회의원 부인이었다던 단추 다는 아주머니, 아들이 의학박사라는 실밥 따는 할머니, 간호원이었던 미싱 하는 아주머니 등으로 공장 직원이 구성되다 보니 이런 말을 하면서 깔깔깔, 핫핫핫 웃곤 했지만 웬지 옛날을 그리워하는 쓸쓸한 웃음인 것 같았다.
1987년 11월 돈이나 벌어보자고 주얼리 가게를 열었다. 사장이란 호칭도 들었고 돈도 벌었다. 고정된 주급과는 달리 매일 들어오는 돈의 매력을 느껴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뛰었다. 차츰 장사하는 방법도 터득해 갔고 장사꾼으로 내 모습도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나의 예술가의 꿈의 날개는 접은 채로 피지도 못하고 그대로 잃어버렸다.
1989년 5월 독신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고독에서 헤어나기 위해 결혼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살면 살수록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사는데 불편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었다. 이해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어느 한계가 넘으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고 큰소리가 자주 나서 어느 때보다 사는 것이 화가 나고 힘들고 짜증스러웠다.
남편과 사니 안 사니 하며 아웅다웅 하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술품인 것을 시간이 갈수록 느끼고 느꼈다. 뱃속에서부터의 신비로운 변화와 태어나서 귀엽고 예쁘게 변화하는 모습은 어느 예술품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할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며 아이들은 차츰 나의 전부가 되어갔고 내가 사는 이유가 되어갔다.
그리고 이 소중한 예술품을 준 남편에 대한 사랑도 생기고 마음도 너그러워져 남편에 대한 나쁜 감정도 아이들과 더불어 씻어갔고 생활의 리듬도 생겼고 사는 재미도 새록새록 아이들의 변화와 함께 생겨났다.
가족과 나를 위해서 날개 잃은 새일지라도 몸으로나마 따뜻한 둥지를 만들고 가꾸면서 그 둥지 안에서 행복과 꿈을 찾아야겠지. 결코 이 땅 디디고 산 나의 삶을 후회하는 일이 없기 위해서라도. 날개 있는 새 보다 더 힘차게 저 하늘을 향해 휠휠휠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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