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에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 적이 있다. 겨우 세 살 정도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태풍의 눈 부분이다.
부산에 살 때였는데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이불을 꼭 꼭 여며 뒤집어쓰게 하였지만 태풍이 왔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수선거림에 귀는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쫑긋 열려있었다. 들리는 것은 마당의 세숫대야가 쨍그렁하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날아가 부딪치는 소리뿐, 그마저도 이내 평화로운 정적이 왔다.
강력한 태풍이 불 때는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원심력이 강해지는데 이때 비교적 바람이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부분으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태풍의 눈, 그러나 그 맑고 담담한 기운이, 그 고요가 참다운 고요일까?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무서운 상태가 아닌가.
요즘 한국 사회가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의 비리 연루 의혹으로 폭풍전야처럼 시끄럽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온 나라가 부정 부패 연결 고리 속에 얽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살기 답답하겠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정작 태풍의 눈속에 있는 보통 사람들은 고요하게 자신의 일을 하며 묵묵히 살고 있을 것이다.
이곳 뉴욕도 작년에 9.11이 발생하자 한국의 가족·친지들은 뉴욕으로 쉴새없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위험하지 않으냐?”, “어떻게 출퇴근을 하느냐?”, “먹을 것은 준비되어 있느냐?”등등.
하지만 우리들은 하루 세 끼 꼬박 챙겨먹고 맨하탄이고 뉴저지고 볼일이 있으면 다 갔다. 다소 교통이 혼잡하고 시간이 좀더 걸렸을 뿐 우리의 일상생활은 별 탈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잠시 그러했을 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경제는 서서히 마비되어 갔고 더불어 한인경제도 바닥을 기었다.
한국은 대선을 앞두고 터진 각종 게이트와 비리에 대한 민심의 서슬 퍼런 분노가 날로 깊어가고 있을 것이다. 모쪼록 이 분노를 잘 다스려 유권자의 한 표가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인을 뽑는데 쓰여져야 할 것이다.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일부 언론에 말려들지 말고 경제·이산가족·교육 등 각종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 특히 그 부인이나 자식의 됨됨이를 객관적 잣대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뉴욕에 사는 한인들은 무엇을 해야할까. 우리 역시 태풍의 눈속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며칠 전 LA 4.29폭동 10주년이 지났고 뉴욕에서도 불과 12년 전인 1990년 1월 브루클린 두 한인청과상 레드애플과 처치 푸르츠에서 발생한 흑인 고객과의 시비가 전 한인에 대한 반대 시위로 확대되어 교포사회가 긴장했던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다음 해인 1991년에도 브루클린 크라운 하이츠에서 흑인과 유대인간 유혈충돌 사건이 일어나 당사자가 아닌데도 한인 신발가게와 야채가게가 강탈당하는 등 이민자에 대한 흑인계의 반감이 표출되었었다.
가까이는 1998년 맨하탄 청과상 한인업주와 히스패닉 종업원간 불화가 빚어진 노조 사태가 1년 이상을 시위로 얼룩지게 하였다.
이민 와서 살고있는 한, 자영업이 대부분인 한인들은 종업원이거나 고객이 되는 히스패닉과 흑인과의 인종 차별 문제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잘살면 잘살수록 그러한 갈등은 심화된다. 복합민족이 살아가는 미국 내에서 사는 한, 한인 및 이민자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언제나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런 혼란의 시대라도 그 속에서 사는 한 우리는 피해갈 수가 없다. 비가 내리면 몸이 젖어야 하고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 한다.
그러나 미리 흑인 종업원을 고용하여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히스패닉 단체에 장학금을 수여하는 것은 훗날 ‘우산’과 ‘비옷‘이 될 수 있다.
이밖에도 인종갈등의 불씨를 끄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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