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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80년대말에 경기도 이천을 다녀오면서 썰렁한 황무지에 불도저가 공장부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현대 그룹 사람들은 그곳에 삼성전자보다 큰 반도체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지난해 이천을 다시 가보았을 땐 100년전에 도자기를 굽던 일대가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 현대전자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시끄럽게 하는 하이닉스(Hynix)다.
지난달 30일 하이닉스 이사회가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체결한 양해각서(MOU) 동의안을 만장일치로 부결, 한국은 물론 뉴욕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경제뉴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CNBC, CNNfn이 헤드라인으로 하이닉스 이사회의 결정을 보도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이닉스 이사회의 결정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크론의 요구가 무리였고, 양해각서대로 따라갈 경우 한국의 유수한 자산이 헐값에 매각되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은 자사 1주를 35달러로 제시, 하이닉스 주식과 교환하겠다고 제시했는데, 30일 현재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의 마이크론 주가는 24달러로 떨어져 있다. 한국으로선 34억 달러짜리 거래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손해보는 것이다. 사는 쪽에서 배짱을 부리며 한국의 주요 산업시설을 헐값으로 주워가겠다는 심산이다.
또 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마이크론은 한국의 채권은행에게 60억 달러의 부채를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8조원에 해당한다.
마이크론은 부채 한푼도 떠맡지 않고, 종이조각(주식)을 발행해 하이닉스의 알짜배기 시설인 반도체 라인만 떼서 가져가겠다고 한 것이다. 채권은행단은 하이닉스 이사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하이닉스가 헐값에, 그것도 빚을 한푼도 떠안지 않고 알짜배기만 빼가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한국 정부다. 한국 정부는 국제 사회에 매각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마이크론과의 협상을 독려했고, 마이크론은 배짱을 부리며 협상을 끌다가 마지못해 사주는 것처럼 보인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혹자는 하이닉스를 해외에 매각하지 않으면 그 부담이 은행에 넘어가고, 결국 정부가 국민세금으로 부채를 안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하이닉스 매각이 부결된 날 시장 반응을 보자. 하이닉스 주가는 14% 폭등하고, 마이크론 주가는 10% 폭락했다.
주식시장은 때론 패닉과 탐욕의 광기에 휩쓸리지만, 다중의 투자자들이 기업 경영의 잘잘못을 표결하는 정직한 심판관이다. 시장이 하이닉스 이사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다.
하이닉스가 넘어야 할 고비는 많다. 우선 당장 만기가 돌아올 막대한 부채를 갚아나갈 돈이 없다. 또 마이크론이 보복으로 반도체 가격을 떨어뜨리거나, 미국 정부를 움직여 전가의 보도인 통상보복을 할 수도 있다. 반드시 생존한다고 보장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이닉스를 외국에 공짜로 떠넘기기보다는 살려서 제값에 파는 방안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도 망해가는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철강재 수입을 제한하고 있질 않는가.
우선 생각해볼수 있는 방안은 하이닉스의 주력분야인 반도체를 살리고, 비주력분야를 매각하는 것이다. 주력을 팔고, 비주력을 남기겠다는 기존의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또 노조의 반발이 있겠지만, 인력을 더 줄여 최소한의 인원으로 공장을 가동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
은행들도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를 나눠 갚는 방안이나 이자를 경감해주는 방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론에 팔아 돈을 받지 못할 바에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하이닉스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때 팔아도 된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고 있고, 지난 1/4분기에 하이닉스는 흑자를 냈다. 꼭 살리지 못하더라도 제값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땐 마이크론 한 회사에 매달리지 말고 독일 회사도 참여케 해 경쟁입찰에 부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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