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흐름은 발전과 진보를 그 추진력으로 삼아왔다. 특히 20세기는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그로 인한 사회 전반적 변화가 숨가쁘게 우리의 삶을 바꿔온 한 세기였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강하게를 추구하며 발전과 진보를 지상목표로 삼던 지난 한세기의 마라톤 경주에서 미국은 단독승자로 결승점에 도달함으로써 지구상의 유일한 수퍼파워로 20세기를 마감했다.
미국이 빛나는 발전과 진보의 어두운 이면을 부당하게도 참혹한 방식으로 체험하면서 21세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것이 사실이지만, 치열한 경쟁을 불가피하게 동반하면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낙오자를 배출했다. 미국을 대표주자로 하는 선진국들이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를 누리고 있는데 반해 지구상 인구의 절반은 하루 평균 2달러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외집단의 골 깊은 박탈감에 맹목적이고 과격한 신앙이 불을 붙이면서 해묵은 증오와 분노, 질시를 폭발적으로 터트려 낸 것이 9월11일 동시다발 테러사건이라고 할수 있다.
무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미국의 힘과 자본주의의 전당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경악, 3,000여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뼈아픈 고통, 그리고 연이은 탄저균 테러로 초래된 공포감과 무력감이 미전국을 휩쓸고, 부시행정부가 테러집단에 대한 응징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마치는 동안 2001년의 가을은 가고 겨울이 왔다. 이 예상치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21세기의 첫해에 경험하면서 우리가 평소 잊고 있던,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물어야 할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테러의 충격은 소외된 집단, 우리가 아닌 남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동계 이민자들이 국민적 분노의 희생양이 된 또 다른 ‘테러’가 없지 않지만, 이슬람교와 아랍계라는 지구촌의 먼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왜 미국이 그토록 미움을 받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분위기가 사회 일각에서 조성되었다는 것은 21세기의 첫발을 내딛는 이때에 의미가 있는 일이다. 아울러 언제나 곁에 있을 것으로 여겼던 가족, 친지, 동료를 한순간에 잃는 직간접의 경험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개개인에게 던져주었다. 발전과 성장만을 쫓는 물질만능의 급물살 속에서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질문들이 테러의 충격으로 불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외형적 급성장이 남들의 질시를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미움의 표적이 되었던 경험을 한인사회는 이미 겪은 바 있다.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한인사회를 지난 한세대 남짓한 기간에 오늘과 같은 성장으로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희생이 없지 않았다. 주변 타인종 커뮤니티의 존재를 미처 의식하지 못하면서 알게 모르게 이기적 배타주의를 형성했고, 그것이 내년으로 10주년이 되는 4.29폭동이라는 쓰라린 이정표를 초래했다.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 이민의 꿈을 성취하려는 일 중독증에 버금가는 생활태도는 또 종종 가정을 희생시켰다. LA 카운티만을 예로 들어도 하루 평균 2건에 달하는 한인부부의 이혼신청, 심각한 청소년 탈선문제등 삐걱거리는 가정문제는 많은 경우 성취 때문에 가정이 뒷전으로 돌려진 결과이다.
명실공히 다사다난했던 2001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가라앉은 경제 때문에 심란하고 불안한 연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존재들이 아직 거기 있다면 희망은 있다. 성취만을 쫓던 눈을 돌려 사람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이웃들과 더불어 나아갈 때, 그래서 화목과 평화가 같이 할 때 발전과 진보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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