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일찍부터 꽤 많은 짐승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너구리란 짐승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이를 처음 본 것은 미국에서였고 ‘라쿤’이라 불리기 때문에 웬지 느낌이 너구리와는 다른 짐승같은 생각이 든다. 역시 이곳 너구리는 ‘라쿤’이라 불러야 실감이 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 이름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상표가 있다. 누구라도 이 이름의 라면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도 친하지도 않는 이 짐승의 이름을 상표로 정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이 너구리가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에게 아주 친하게 알려진 동물이다. 많은 동화나 어린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라면이라는 상품이 일본에서 개발되어 들어온 것이고 보면 이 너구리라는 라면의 상표도 일본에 있던 상표를 그대로 들여왔거나 일본에서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동물이므로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이 이름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이유에서나 간에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은데 웬지 맹목적인 모방같은 감이 들어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수입 미국영화 중에 ‘가수무’라는 이름의 영화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영화관의 간판 그림만 보고 들어가긴 했지만 그 제목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제목이 아프리카 수단의 해안도시 카-툼(Khartum)의 표기인데 그것도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옮겨온 것을 알았다.
요사이 일본의 교과서 문제로 인하여 일본을 혐오하거나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 이럴 때에는 꼭 왜색을 모방했다거니 또는 반일 내지는 항일성 국수주의자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낸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고 보면 부끄럽게도 우리 스스로가 그것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런 모방이 자행되고 있고 일반 시민들은 또 아무런 저항없이 그렇게 쫓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사이 뉴욕의 한국어방송을 들어보면 어느 식당의 상업광고 중에 “...푸짐한 쯔끼다시와 사시미...” 운운하는 일본어가 식단 이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광고를 들을 수 있다. 물론 일본어를 쓴다고해서 나쁘다고 비난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은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막연히 일본식 용어를 그냥 여과없이 쓰는 것이 관행이 된 것 같다.
한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유식을 자랑이라도 하듯 DC라는 말을 많이 쓴다. 알고보니 영어의 디스카운트라는 말을 일본사람들이 자기 편한대로 DC라는 일본식 약어로 만든 것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쓰는 사람이 유식해 보이기는 커녕 반대로 교양없어 보인다.
정부에서나 국회의 입법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몇해 전 일본에서 써먹었던 것을 자구수정 조차 하지 않은 그대로 베껴서 내놓는 얼굴 두꺼운 국회의원이나 정당이 있다. 물론 좋은 선례가 된 법률은 본 받아야 옳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 맞도록 검토를 거친 뒤 적어도 순수한 일본말은 우리말로 고쳐서 우리 것으로 다시 써야 옳은 순서이다.
우리의 정부나 지도층에서까지 이처럼 꼭두각시 같이 일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을 보는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아무리 교과서 왜곡이 어떻다고 떠들어도 그들은 코방귀를 끼고 있는 이유를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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