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열의 경제칼럼
▶ <뉴욕 페이스대 석좌교수>
한국에서는 아직 엄청난 재산이 기업가로부터 예술재단으로 손을 옮겨가서 여러 시민들이 예술품들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감상하게 되는 예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호암미술관 같은 것이 있긴 하나 그 역할과 규모면에서 미국의 그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우선 기업가들이 모은 재산과 예술재단으로 기부된 액수들이 엄청나서 예술의 향기를 보통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정도가 상당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말리부에 있는 게티센터라고 볼 수 있다.
게티센터를 짓는데 폴 게티재단에서 10억달러를 썼고 예술품과 예술연구와 교육에 20억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120년 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생긴 후 예술쪽으로 이렇게 큰 규모로 예산이 나간 적이 없다. 그러고도 게티재단의 재산이 50억달러 정도 남았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데는 꼭 착한 마음만이 필요한 게 아닌 것이 폴 게티가 재단을 만든 스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소 그의 행적처럼 크게 착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폴 게티는 그의 석유회사가 다른 유능한 세력으로 경영의 실권이 넘어가는 것을 항상 두려워해서 궁리 끝에 고안한 방법이 게티 박물관이었다.
게티가 죽은 다음 면세로 그의 소유권이 게티 박물관으로 상속되게 해 놓고 자기의 네 아들이 그 박물관을 콘트롤하도록 했는데 이 처음의 박물관이 옛날 말리부 게티의 로마식 빌라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때 게티 박물관을 찾은 분들은 미술 페인팅이 별로 없고 주로 로마식 가구, 조각품과 태피스트리로 가득한 박물관을 보았을 터인데 그 이유는 게티의 ‘짠’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생전에 예술품을 살 때도 그는 미술 페인팅은 너무 값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좀 값이 싼 가구나 조각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게티재단이 풍족한 데에는 아주 우연하게 생긴 에피소드에 이유가 있다.
1981년에 해롤드 윌리엄스(이 분은 필자가 학생일 때 미국 증권감독원 SEC 회장으로 연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가 재단회장으로 취임한 다음 재산관리를 워낙 잘 해서 주식시장에서 재단의 재산이 엄청나게 늘었는데 원래 폴 게티의 유언장에 따르면 이런 가족 외부인이 회장이 될 수 없었다.
원래는 게티의 유언장에 자기의 상속인들이 재단 이사회를 콘트롤하게 했다가 게티가 죽기 몇달 전에 박물관과 그 재산의 콘트롤을 그 당시의 이사회에 넘겨버렸다. 무슨 변덕이었는지 모르나 그 당시의 이사회를 게티의 아들들이 소수로 장악할 수 없을 때 그렇게 되었는데 게티의 유언장 변경이 박물관의 장래로 보아서는 상당히 잘 된 셈이다.
비영리 기관에서도 경영이 제대로 되어야 그 혜택을 받는 이들이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얘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재산이란 그 규모가 커지면 가족 바깥으로 경영인을 찾는 게 모두에게 좋은데 결국 게티의 후손들도 이 덕분에 재산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교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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