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서추세츠주 뮤지엄 재단장
▶ 사후 사라진 정원·과수원·온실, 발굴자료 토대 복원작업 한창
시인 에밀리 디킨슨(오른쪽)이 살았던 ‘홈스테드’ 저택 정원에 백합과 호로새꽃이 피어있다.
어떤 이는 교회에 가서 안식일을 지킨다
나도 지킨다, 집에서 머무르며
쌀먹이새를 성가대원 삼아
그리고 과수원을 돔 지붕 삼아
-에밀리 디킨슨
그 과수원은 진짜 있었다. 사과, 배, 자두, 그리고 체리나무들은 디킨슨 가족이 살았던 당시 잘 가꾸어져 있었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면서 '홈스테드'(Homestead)라고 불리는 디킨슨 하우스의 다음 주인들은 과수원을 없애고 잔디에 많은 꽃과 채소를 심었고 테니스 코트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닥치면서 그 땅은 크게 훼손됐다.
매서추세츠 앰허스트에 있는 에밀리 디킨슨의 집 인근 부지를 연구팀이 발굴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봄 에밀리 디킨슨 뮤지엄은 매서추세츠주 앰허스트의 트라이앵글 스트릿 인근 양지바른 땅 한쪽 코너에 시인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과수원을 다시 살려내고 사과와 배를 심었다. 영화롭던 19세기 디킨슨 저택의 옛 모습을 다시 복원하려는 오랜 노력이 최근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집 주변의 땅을 발굴해온 프로젝트는 올 여름 다시 재개된다.
작년 여름 고고학 연구팀은 저택의 남동쪽 코너 가까운 곳에서 디킨슨 정원의 또 다른 일부를 발굴해냈다. 지난 2년 동안 이 팀은 한때 작은 온실이었던 곳의 토대를 찾아내 발굴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에드워드 디킨슨은 1855년 두딸인 에밀리와 라비니아를 위해 그린하우스를 지었다. 에밀리는 긴 창문이 달린 방을 연중 재배 정원으로 만들고 고사리가 가지를 뻗고 치자나무와 자스민 향기가 가득하며 푸크시아와 카네이션이 헬리오트로프 옆으로 꽃을 피우는 온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시인이 죽고 난 뒤(지난 22일은 130주기였다) 30년이 지난 1916년 새 주인은 이곳을 허물어버렸다.
이제 홈스테드와 '에버그린스'(에밀리의 오빠 부부의 집)로 이루어진 에밀리 디킨슨 뮤지엄은 그 온실을 완전히 복원하고 당시의 과일나무들을 모두 다시 심을 준비를 하고 있다. 계획대로 잘 되어간다면 뮤지엄은 올해 말까지 원래의 건축자재를 사용한 온실 건축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홈스테드의 온실과 정원을 복원하게 되면 디킨슨에 대해 매우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인이기에 앞서 아마추어 박물학자였으며 식물학에 대한 지식이 많은 유명 원예사였다. 살아생전 에밀리 디킨슨은 시인으로서보다는 원예사로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에밀리 디킨슨의 가든’의 저자인 주디스 파는 쓰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식물학에 대한 열정은 그녀의 성격, 영성, 그리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뮤지엄의 제인 월드 관장은 “그녀의 개인적인 실제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며 “에밀리 디킨슨의 모든 창의력과 날카로운 관찰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집과 정원은 시상의 실험실이었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디킨슨은 어린 시절부터 식물의 왕국을 경애했다. 틴에이지 시절에는 숲을 돌아다니며 야생꽃들에 매혹됐고 시집이 아니라 식물에 관한 책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수많은 종류의 식물과 화초들을 눌러서 말렸고 종이에 예쁘게 붙인 다음 라틴명으로 세례를 주기도 했다.
30대부터 디킨슨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상당히 큰 집 대지를 돌아다니며 보냈다. 여러 에이커에 달하는 목초지를 걸어다니며 소나무와 오크나무, 느릅나무를 비롯해 과수원을 돌봤다. 시인의 조카인 마사 디킨슨 비안치는 포도나무 넝쿨과 인동나무 그늘, 장미로 뒤덮인 서머하우스, 그리고 수선화, 히아신스, 국화, 수국, 모란, 백합 등 수많은 꽃들이 계절마다 피고 지던 광경을 기억한다.
식물학과 원예에 관한 전문 지식과 통찰은 디킨슨의 시에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그녀가 남긴 1,789개의 시에서 디킨슨은 식물에 관해 약 600회 썼으며 80여종의 이름을 언급했다. 꽃에 대한 350여회의 언급 중에는 장미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디킨슨은 민들레와 클로버, 데이지 등의 평범한 화초들도 무척 좋아했다.
시인은 눌러서 말린 화초들의 컬렉션을 책으로 만들어놓았다.
디킨슨의 많은 시들은 그녀의 특별한 정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포도나무와 옥수수를 기르느라고 고생한 이야기를 ‘내 땅의 암울함에 대하여’(on the Bleakness of my Lot)라는 시에서 쓰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포도나무와 옥수수가 잘 되지 않는 뉴잉글랜드 땅에서 농사지은 경험을 묘사한 것이었다.
다른 시와 편지들에서 그녀는 ‘나의 작은 다마스크 처녀’(my little damask maid)라든가 ‘스윗 술탄’(Sweet Sultan)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메이드와 술탄은 하녀와 왕족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다마스크 장미꽃과 방울술이 달린 해바라기 과의 보랏빛 수레국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디킨슨이 화초와 정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모르는 학자들은 그녀의 시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디킨슨은 38세가 되면서부터 교회 가는 일을 멈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정원에서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았기 때문이다. 봄마다 화려하게 살아나는 정원은 영생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한층 드높여주었다.
그녀의 사후 수십년동안 홈스테드의 꽃과 야채 정원은 원래의 3분의 1 규모로 축소됐다. 그러나 지난 해 닥터 린치와 동료 고고학자들은 길고 뾰족한 금속 막대기를 이용해 홈스테드 동쪽에서부터 장미나무로 뒤엎인 서머하우스와 그보다 더 큰 19세기 화초및 야채 온실로 향하는 길을 오랫동안 묻혀있던 자리에서 찾아냈다.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이 길의 끝까지 찾아낼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우리는 옛날 디킨슨 정원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 닥터 린치와 동료들은 근처 정원들을 계속 발굴해 오래전 화초를 재배했던 부지를 찾아내려 하고 있다. 다른 곳들보다 흙이 검고 부드러운 부분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어쩌면 씨앗이나 기타 식물학적 증거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닥터 린치는 어떤 씨앗들은 굉장히 생존력이 강하기 때문에 수만년 동안 묻혀있다가도 싹을 틔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킨슨이 자기 방에 비밀스럽게 숨겨두었던 시들처럼 시인의 정원에서 살아 숨쉬던 유기체의 조각들이 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누군가 그들을 찾아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뉴욕타임스 본보특약> <사진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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